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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5월 혁명과 독립 100주년 축구 대회
1. 19세기 초 5월 혁명 발생
19세기 초 영국은 부에노스 아이레스(Ciudad Autónoma de Buenos Aires, 현 아르헨티나의 수도)를 침공했고,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호세 데 산마르틴(1778~850년, José Francisco de San Martín Matorras, 군인)의 주도로 혁명이 발생했다고 한다.
남미의 군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호세 데 산마르틴에 의해 "5월의 혁명"이 발생하며 1810년 5월이 되어서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1816년 7월 9일 투쿠만 회의(아르헨티나 독립 선언서, Argentine Declaration of Independence)를 통해 공화국 선포를 알린다. 시간이 흘러 정치적 문제에 따라 문화가 달랐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가 이탈하였고, 하나의 정부, 강력한 정부를 원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중앙집권주의자들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한 연방주의자들 사이의 내전이 여럿 발생하기도 하였다.
2. 아르헨티나 내전
아르헨티나의 초대 대통령은 1826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통일당 출신의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1780~845년, Bernardino Rivadavia)였다. 당시 득표율은 무려 92.11%였다고 한다. 리바다비아 제1대 대통령은 라플라타 강 하구에 위치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국유화하고 그 수익을 통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려 했으나 반대 세력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1827년이 되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계속된 내전에 시달려야만 했으며, 각 주의 주지사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연합국(Confederación Argentina)이라는 국가 기틀은 완성되어 있었으나 중앙집권 체제는 되지 못한 것이었다.
이후 1853년이 되어 아르헨티나의 각 주지사들이 모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에 동의하는데 이로써 아르헨티나가 연방국가가 되었고,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가 아르헨티나 연방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이 역사 사이에서도 긍정의 투를 내비치지 못했으며, 1852년 9월 11일이 되어 아르헨티나 연방 탈퇴 선언 및 부에노스 아이레스국을 선포하였다.
계속되는 내전이 이어지고, 1862년이 되어 통합된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탄생했는데 이때의 국가 지도자가 제6대 대통령인 바르톨로메 미트레였다.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번영을 누리는 아르헨티나인데 훗날 1916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을 개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3. 독립 100주년 축구 대회
1916년 설립된 남미축구연맹(CONMEBOL)은 1916 남아메리카 챔피언십(현 코파 아메리카)을 개최했고, 그 개최지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였는데 이는 아르헨티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개최된 대회였다. 다만 대회 최종 우승은 이사벨리노 그라딘을 앞세운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몫이었다.
▼ 1916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콘텐츠 ▼
4. 역사를 따지자면 아래와 같다.
- 1776년 8월 1일 :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편성, 역대 부왕령 중 가장 늦게 만들어졌으며, 1825년 해체되었다.
- 1810년 5월 25일 : 호세 데 산마르틴의 주도로 5월 혁명 발생 및 독립 선포, 임시 정부 수립.
- 1816년 7월 9일 : 투쿠만 회의를 통해 공화국을 선포하며,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
- 1853년 5월 1일 : 헌법이 제정되었다.